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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 폭로에 계셨던 분들, 관객운동에 마음을 나누고 계시는 분들과 함께.....
글쓴이 : 관객 조회수: 324 2018-04-14 13:01:30

이번 사건이 나고 많은 생각을 하게 했던 이곳 게시판에 함께 좋은 글을 나누고 싶어서 올립니다.


< 혐오사회 : 증오는 어떻게 전염되고 확산되는가 / 카롤린 엠케 지음 , 정지인 옮김, 다산초당 >

때때로 나는 자문한다. 그들을 부러워해야 하는 걸까 하고. 때로는 그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어떻게 그토록 누군가를 증오할 수 있는지 의아하기만 하다. 어쩌면 그렇게까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일까. 증오한다는 건 확신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말하고 위해를 가하며....모욕하고 공격할 수 없을 것이다.
.....증오는 증오의 대상을 곧바로 겨냥하며 완벽하게 들어맞는 대상을 찾아낸다.


언제부턴가 홀로코스트를 끊임없이 거론하는 일도 이제는 서서히 마침표를 찍어야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가 갈수록 자주 들려온다. 아우슈비츠를 기억하는 일에 무슨 요구르트처럼 정해진 유통기한이라도 있는 듯이. 나치즘의 범죄를 반성하는 일이 마치 꼭 들러야하는 관광지 목록처럼 한 번 보고 나면 지워버려도 되는 것처럼. 아무튼 독일에서는 이미 뭔가가 달라졌다. 사람들은 이제 공공연하고 거리낌 없이 증오를 표출한다. 때로는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때로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그리고 대개는 전혀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익명으로 된 협박 편지는 과거에도 있었지만, 요즘에는 이름과 주소까지 명기한다. 인터넷상에서 폭력적 공상을 펼치고 혐오와 증오로 가득 찬 댓글을 달때도 이제는 닉네임 뒤에 숨지 않는다.


대화에 대한 전통적인 기대가 모두 뒤집히고 상호관계의 기준도 완전히 역전된 것 같다...상대방을 전혀 존중하지 않고, 오히려 가능한 한 거칠고 난폭하고 편견 가득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자랑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는 결코 그런 식의 생각과 행동을 문명이라고 보지 않는다. 이를 저지하지 않고 그대로 둔다면 누구라도 포악함과 모욕과 침해를 당할 수 있다. 요즘에는 적대감을 과시적으로 표출하는 행위에 이른바 공적인 의미, 심지어 정치적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에 편승해 내면의 모든 천박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결코 문명인이라 할 수 없다. 다른 많은 이들처럼 나도 그런 것에 익숙해질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곳에서나 유럽에서나 다른 어느 곳에서나 새로이 일고 있는 이 서슴없는 증오에 대한 욕망을 결코 정상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을것이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혐오와 증오는 개인적인 것도 우발적인 거도 아니다. 단순히 실수로 또는 궁지에 몰려서 자기도 모르게 분출하는 막연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에 따라 집단적으로 형성된 감정이다. 이것이 분출되려면 미리 정해진 양식이 필요하다. 모욕적인 언어표현, 사고와 분류에 사용되는 연상과 이미지들, 범주를 나누고 평가하는 인식틀이 미리 만들어져 있어야 한다. 혐오와 증오는 느닷없이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훈련되고 양성된다. 그것을 자발적이거나 개인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모든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그 감정들이 계속 양성되는 일에 기여하는 셈이다.


사실 그보다 훨씬 더 위협적인 것은 광신주의적 풍토다. 비단 독일뿐 아니라 다른 곳들도 마찬가지다....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에 대한 혐오와 멸시가 계속 심호되고 확대되면 결국 모든 사람이 해를 입게 된다. 증오의 표적이 되거나 목격자가 되면 우리는 대개 간담이 서늘해져 입을 다물어버리기 일쑤이고, 쉽게 겁먹고 기가 죽거나, 포악함과 공포에 대처할 방법을 몰라 자신이 무방비 상태라고 느껴 마비된 것 같은 상태가 되어 공포 앞에서도 입도 뻥긋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바로 그런 것이 증오가 가진 힘이다. 증오는 제 손아귀에 들어온 존재에게서 일단 평정을 빼앗고 이어서 방햐감각과 자신감까지 앗아가 버린다.
증오에 대처하려면 자신과 똑같아지라는 증오의 유혹을 뿌리치는 수밖에 없다. 증오로써 증오에 맞서는 사람은 이미 자기도 따라 변하도록 허용한 셈이며, 증오하는 자가 원하는 모습에 가까워진 것이다.


증오에는 증오하는 자에게 부족한 것. 그러니까 정확한 관찰과 엄밀한 구별과 자기회의로써 대응해야 한다. 그러려면 증오를 이루는 성분들을 천천히 하나하나 해체해야 하고, 강렬하고 발작적인 감정으로서의 증오를 그 이데올로기적 전제들로부터 분리해 어떤 역사적, 지역적, 문화적 맥락에서 발생해 작동하고 있는지 고찰해야 한다. 이러한 일이 별것 아닌 듯 여겨질지도 모른다. 아주 소박한 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정말로 광신적인 이들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말은 충분히 반박할 수 있다. 증오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근원과 증오가 날뛸 수 있게 하는 구조, 증오가 작동하는 기제를 더 잘 알아차릴 수 있으면 그것에 대응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증오에 동조하고 환호하던 사람들이 자기 확신을 잃게 할 수만 있어도 도움이 된다. 또한 사고방식과 관점을 형성하는 단계에서 이미 증오로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 이들에게서 경솔한 순진성이나 냉소주의를 제거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이제는 조용하게 평화로운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을 혐오하고 멸시하는 자들이 스스로 정당함을 증명해야 한다. 이제는 곤궁에 처한 이들을 돕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당연한 일을 거부하는 자들이 정당성을 입증해야 하며, 개방적이고 인간적인 공존을 원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것을 뒤엎는 자들이 자기변호를 하는 상황이 되어야 한다.


증오와 폭력을 고찰할 때는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구조도 함께 고찰해야 한다. 이 말은 증오와 폭력이 번성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사전 정당화와 사후 동의의 과정을 가시적으로 드러내 보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구체적인 사례들에서 증오나 폭력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다양한 원천을 고찰한다는 것은, 증오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며 엄연한 사실에 근거한다는 잘못된 통념에 맞서는 일이다.


그 통념은 증오가 마치 존경심처럼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진짜 감정이라고 우긴다. 그러나 증오는 그저 존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만들어지는 것이다. 폭력 또한 단순히 거기있는게 아니다. 준비되는 것이다. 증오와 폭력이 어느 방향으로 분출되는지, 누구를 표적으로 삼는지, 또 그러기 위해 먼저 어떤 장벽과 장해들을 제거하려 하는지, 이 모든것은 우연하거나 단순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된 것이다. 한편 증오와 폭력을 그 자체만으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작동 방식들 안에 놓고 비판해야 한다는 것은 뭔가 다른 것이 존재할 수도 있었을 가능성, 누군가 다른 결정을 내릴 수도 있었을 가능성, 누군가 개입할 수도 누군가 발을 뺄 수도 있었을 가능성까지 보여주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증오와 폭력이 정확히 어떤 추이를 따라갔는지 기술한다는 것은 그것들이 중단되거나 전복될 수 있는 가능성까지 밝혀내는 것이다.


몇몇 특정한 형태의 증오에 대해서는 검찰과 경찰이 책임지고 대처해야 한다. 그러나 배제와 고립의 형식들, 태도와 습관, 관행, 신념 등에서 나타나는 편협하고 야비한 따돌림의 수법들에 대해서는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증오하는 자들이 그 대상에게 해를 입힐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은 문명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그것은 남에게 떠넘길 수 없는 일이다....어쩌면 증오에 대항하는 가장 중요한 태도는 고립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침묵 속으로, 사적인 공간 속으로, 자기만의 은신처나 환경이 주는 보호막 속으로 떠밀려 들어가지 말라. 아마도 가장 중요한 움직임은 자기 밖으로 나오는 움직임일 것이다. 자기 밖으로 나와 다른 이들을 향해 가는 움직임, 그리하여 그들과 함께 사회적 공간, 공공의 공간을 다시 열기 위한 움직임 말이다.


증오의 손아귀에 사로잡혀 그 속에 홀로 남겨진 사람들은 서두에서 인용한 시편의 탄식처럼 "바닥 모를 깊은 수렁에 빠졌다"고 느낄 것이다. 그들에게는 딛고 설 바닥이 없다. 그들은 깊은 심연에 빠졌고 큰물이 그들을 집어삼킨다. 우리는 그들을 홀로 내버려두어서는 안 되고, 그들이 외쳐 부를 때는 귀를 기울여야 한다. 증오의 큰물이 계속 부풀어 오르는 것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 모든 이가 딛고 설 수 있는 튼튼한 지반을 닦아놓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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